간추린 일기
조선학자 윤치호
코니
코니 가입일:2022.11.19

작성일시:2026.07.23 21: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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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100년도 지난 윤치호를 존경한다.
윤치호의 어록을 보면 조선인은 감수성에 젖어 산다고 한다.
인간의 감정은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뛰어나다.  그러나 그 감정이 때로는 불필요한 선택과 후회를 반복하게 만든다.

윤치호1865~1945는 1866년 윤웅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웅렬은 수신사 행렬에 참여했고 별기군을 이끌었으며 나중에는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산을 받게 되는 인물이었다. 윤치호는 개화파였던 아비의 영향을 받아 근대화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879년에는 대표적인 온건개화파인 어윤중의 밑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1881년 그에게 처음으로 외국에 나갈 기회가 마련되었다. 홍영식, 어윤중, 박정양 등이 선발된 조사 시찰단이 일본에 가서 서양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여정이 계획되었던 것이다. 윤치호는 어윤중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갔고, 주선을 받아 게이오 의숙이라는 신식 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1883년까지 유학 생활을 하면서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했고 영어와 신식 기술을 배웠다.

그해 5월, 조선에 부임해 온 초대 미국 공사의 통역 역할을 맡아 귀국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도 일하고 참의교섭통상사무로 승진도 했지만 얼마 안 가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와 각별한 사이였기에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다고 여긴 윤치호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3년 가량 동안 상하이 중서서원에서 배웠다. 외국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아 기독교를 믿게 되기도 했다. 1888년 9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더 긴 유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 입학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893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1895년까지 다시 상하이 중서서원으로 가서 영어 교사로 생활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만 본다면 윤치호는 크게 특별할 것 없는 개화파 지식인 중 한 명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1897년 독립협회 지도부 중 한 명이 된 뒤에는 따로 설명할 만한 행적을 보인다. 윤치호는 서재필, 이상재, 이완용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었고 〈독립신문〉 사장 겸 주필, 독립협회 부회장, 회장 대리 등을 맡았다. 1898년 7월에는 중추원고려시대에 왕명 출납을 맡은 일종의 비서실 기관의 이름이기도 함. 고려의 중추원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추밀원이라는 명예 기관으로 하락했고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의 자문을 맡은 어용 단체의 이름으로도 쓰임 1등 의관이 되었다. 참고로 중추원은 입헌 군주제를 주장한 독립협회의 주도 아래 탄생한 대한 제국의 의회와 비슷한 관청이었다.

그해 8월, 고종의 암묵적인 압박을 받은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에는 1대 회장인 안경수가 고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망간 상황이었다. 이에 독립협회에서는 이완용을 2대 회장으로 선임했지만 때맞춰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그 대신 윤치호가 독립협회의 회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윤치호는 서재필의 방향과 상당히 다른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중추원이 가진 의회로서의 기능을 더욱 키우고 최소한 입헌군주제로 나아가자는 생각을 가졌다. 때문에 독립협회 지도부와 함께 의회를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황실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고 여기던 고종과 전면으로 부딪혔고 독립협회와 고종 사이에 무언의 갈등이 생겨나고 만다. 독립협회에서 의정부 참정 조병식, 왕실 비자금을 담당하던 이용익 등 황실파 보수 대신들을 탄핵하자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나중에는 김홍륙 독다 사건이 터졌다. 김홍륙은 함경도 천민 출신이었지만 러시아 통역사로 출세한 인물이었다. 그는 영향력이 커진 러시아 공사관의 위세를 업고 한성 판윤, 외부 협판 등을 거치며 권세를 키웠다. 어느새 신하들이 모두 그의 눈치를 살피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고종은 김홍륙의 유배를 명했다. 그 소식에 분노한 김홍륙은 황제가 좋아하는 커피에 아편을 타서 독살을 시도했는데, 이를 마신 고종이 구토하고 황태자가 쓰러지는 결과를 낳았다. 조정은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김홍륙의 가족들을 잡아서 고문했고

처형한 주모자들의 시신을 길거리에 갖다 버려서 사람들이 훼손케 했다. 모두 법으로 금지된 일이었기에 독립협회와 외국 공사관에서 거센 항의를 해왔다.

윤치호는 김홍륙 독다 사건을 독립협회의 세력을 불리는 데 이용했다. 사건에 관여한 내각의 일곱 신하를 모두 교체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고종은 이 요구를 수락해서 박정양, 민영환 등 협회에 우호적인 이들로 채웠고 자신감을 얻은 독립협회에서는 중추원의 영향력을 늘리고 관민공동회를 여는 등의 일을 성공시켰다.

 
이처럼 윤치호는 긴 유학 생활을 거치고 근대식 문물을 접한 개화파 인사였다. 귀국한 직후인 1895년 갑오개혁의 책임자 중 한 명이 된 것도 김홍집 내각에서 그 경험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동안 유학에 전념한 것과 달리 이를 기점으로 관직에 몸담게 된다. 의정부 참의로 시작해 내각 총리대신 비서관, 학부 협판, 외부 협판 등을 역임했다. 그 도중인 1896년 4월 민영환이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일행에 동참하기도 했다. 일정을 마치고 상트페테부르크에서 민영환 일행과 헤어진 뒤에는 프랑스 파리, 중국 상하이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 뒤로도 고종과 독립협회 간의 알력이 이어졌지만 항상 고종이 한 발 물러서고 요구를 수락하는 식으로 끝났다. 결국 불만을 가진 고종은 대신들이 조작한 익명서를 바탕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려 하거나 황국협회의 보부상들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기까지 했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협회는 더욱 급진적인 성향을 띄어갔다. 조병식 등 대신들이 탄핵되지 않았고 보부상들도 여전히 멀쩡히 걸어다니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고영근 등을 대표로 고종의 처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이 일은 숨죽여 있던 유림 세력의 강한 비난을 맞았다. 무엇보다 자충수가 된 것은 독립협회 대표들 몇몇이 이미 역적으로 낙인찍힌 박영효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자고 추천한 일이었다. 국민들에게도 평가가 좋지 않던 박영효를 추천한다는 소리가 나오자 독립협회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은 쪽으로 기울어갔다. 이에 고종은 이때야말로 독립협회를 제압할 기회라고 여겨서 군대를 동원해 협회를 해산시켰다.

몇 년간 이어진 고종과 독립협회의 알력은 고종의 승리로 끝났다.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민중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오히려 민중이 자신들에게 등을 돌린 것에 크게 분개했다. 또 덕원 감리, 원상항재판소 판사, 함흥 안핵사, 천안 군수 등에 임명되어 조선 백성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미개하고 뒤쳐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개조해야 한다'라는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만다.

윤치호는 한성부 판윤, 외부 협판, 학무부 협판 등을 거치면서 관직 생활을 계속하는 한편 자강회 회장이나 대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자강운동에 몸담았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외부 협판에서 사직한 것에서 보이듯 이때까지만 해도 완전한 친일파로 변절하지는 않은 듯하다.

1912년 일제가 민족 자강 운동을 이끈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윤치호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3년간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다. 1915년 일왕의 특사로 풀려난 뒤 교육 활동과 종교 활동을 계속했지만 3.1 운동을 비판하고 한국인의 민족성을 혐오하는 발언을 여럿 남겼다. 그럼에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조선 내 독립운동가들이 잡혀가는 것을 막으려 하거나 친구이기도 한 안창호의 죽음을 기리는 등 일제에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이 더욱 악랄해지는 1930년대 후반이 시작됨과 함께 윤치호는 일제에 무릎을 꿇었다. 1940년 창씨개명을 했고 일본의 강제 징용을 찬양하는 글을 남겼으며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조선 지원병 후원회 등 친일 어용 단체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조선인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독립 운동을 무의미한 짓거리로 보는 그의 시각은 일본의 제국주의와 동화되어 더 굳어졌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윤치호의 판단은 불과 몇 년 밖에 지나지 않은 1945년 산산이 깨졌다. 광복 이후로도 윤치호는 독립운동가들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거나 자신이 한 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등 쉴드를 쳐줄 수가 없는 행각을 저질렀다.

결국 조선인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친일파로 변절한 지식인, 윤치호는 광복의 해가 끝나기 전 죽었다.


출처 : 조선인을 혐오한 구한말의 지식인, 윤치호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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